안녕하세요. 다른 필진들과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인사를 전합니다. 예측하기 어려웠던 난이도 높은 시장에도 다들 평안하셨는지요.
잠시 글쓰기를 멈췄던 것은 스스로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스스로 어떤 기준을 가지고 투자하는지를 자신 있게 알리기 위해서는 참 많은 내공이 쌓여야 하는구나를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나누고 싶은 고민,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참 많지만 오늘은 많은 분들이 한 번쯤은 궁금해 했을만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비상장 회사는 왜 비쌀까?
2022년 봄, 미국의 금리 인상 이후 어느새 2년 반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미국이 다시 금리 인하를 발표하며 시장은 다시 큰 변화를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금리 인상 사이클 동안 우리의 비상장 시장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말라버린 유동성 탓에 많은 회사들이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잘 실감은 되지 않지만 실제로 많은 회사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Down-round가 실제로 가능한지 의심을 품던 사이클 초반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이제는 기업 가치를 낮추어 투자를 진행하는 회사도 정말 자주 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미리 조달을 마쳤던 대형 펀드들이 투자금 소진 압박을 겪으며 많은 자금이 특정 영역에 쏠리는 풍선 효과는 쉽게 예상하기 어려웠던 점입니다. 대형 팹리스, 생존한 플랫폼 회사들이 비싼 기업 가치에도 자금 조달을 계속 할 수 있었던 이유나, 현금 흐름이 건전한 Growth 단계의 소부장 회사들이 전과 다른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를 같은 맥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가격이면 비슷한 상장사를 사는 게 낫지 않나?”
새로운 국면을 앞두고 있는 우리의 비상장 시장은 이른바 ‘건강한 조정’을 마치고 도약할 준비가 되었을까요. 왜 항상 비상장의 가격은 기대보다 덜 떨어지고 예상보다 더 오르는 것일까요.
가격 형성의 관점에서
가장 확실한 이유는 비상장 회사에 투자하는 VC의 운용 전략이 사실상 롱 온리(Long-only)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상장 시장(Public market)과 비상장 시장(Private market)의 가장 큰 차이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거래의 용이성에 있습니다. 상장 시장의 참여자들이 빈번히 주식을 사고 팔며 시장 가격을 형성하는 것과 다르게, 비상장 시장에는 팔겠다는 사람은 없고 사겠다는 사람만 태반입니다. 시장의 효율성이 낮기 때문에 공정가치(Fair value)를 매기기 어렵다는 표현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파는 물량은 정해져있는데 사겠다는 사람만 있다면? 가격은 당연히 오를 일만 남습니다.
그러니까 매 투자 단계마다 가치가 오르는 것은 회사가 사겠다는 사람만 찾아다니며 투자를 받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 가격을 낮춰 시장에 구주를 내놓는다 해도, 사겠다는 사람의 물량이 훨씬 큰 게 일반적이라 가격 결정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합니다. 회사가 자발적으로 가격을 낮추는 일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 조정은 수차례 IR과 투자자의 거절을 거친 몇 달 뒤에나 이루어집니다.
어쩌면 우리는 구조적으로 항상 비쌀 수밖에 없는 상품에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프리미엄이 정당화되려면
비상장이라는 이유로 매겨진 프리미엄은 비상장이라는 딱지를 떼는 순간 무너집니다. 실제로 코스닥의 아주 많은 회사들이 상장 후 공모가가 채 되지 않는 가격 범위에서 거래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회수 방안이 상장이라면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하나는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장 후에도 프리미엄을 유지할 수 있는 회사에 투자하는 것이죠.
제가 즐겨 읽는 버핏클럽의 집필자 중 한 명인 홍진채 대표님은 주식 프리미엄의 요소를 다음 세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성장 - 이익의 성장률이 높은가
안정 - 이익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가
인식 - 투자자가 더 먼 미래를 더 자신 있게 바라볼 수 있나
(한 마디로 요약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네요. 직접 글을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프리미엄이란 다른 회사 대비 얼마나 비싼가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멀티플(PER, PSR, …)과 같은 말로 해석하는 편이 편한 거 같습니다. 아무튼 프리미엄, 그러니까 멀티플이 높은 회사들을 몇 개 생각해보면 위 세가지 조건은 상당히 공감되는 점이 많습니다. 높은 가치를 인정 받는 회사라면 정말 성장성이 높거나, 또는 성장이 안정적이거나, 무엇보다 그럴 것이라고 믿어주는 시장의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비상장의 거래 형태로 인한 가격 프리미엄이 상장 이후에도 인정 받을 수 있는 진짜 프리미엄으로 전환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간단히 말해 Pre-IPO Round 밸류를 상장 후에도 유지할 수 있는 회사를 짐작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앞서 말한 조건을 적용해보자면 아래와 같은 기준을 정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장 - (이익이면 좋고 아니면 매출이라도) 상장 시점까지 성장하는 모습을 모여주었는지
안정 - (상장하기 위해 만들어낸 재무 성과가 아니라) 규모는 작더라도 퀄리티 있는 매출, 이익이 늘어나며 안정된 사업이 되고 있는지
인식 - (재무적인 성과가 미약하더라도) 성장, 안정에 대해 시장 참여자가 긍정적으로 인식할만한 내러티브가 있는지
공감이 좀 되시나요? 개인적으로는 세 가지 중 3번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민이 많습니다. 성장성과 안정성이 입증된 회사를 좋은 회사라 했을 때, 1년에 신규 상장 되는 80여개 회사, 그리고 그중 VC가 투자한 3-40여개의 회사 중 좋은 회사다 말할 수 있는 곳은 생각보다 정말 많지 않으니까요. (반면 3번조건 만으로 굉장한 프리미엄을 받는 회사가 꽤 많죠)
아쉽게도 우리의 투자 기간 동안 회사의 괄목할만한 재무적 성장을 목격하는 일은 행운과도 같습니다. 어쩌면 상장 시점까지 좋은 회사가 될 수 있는 곳을 찾기보다는,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좋은 회사가 될 수 있다는 설득력 있는 내러티브를 갖춘 회사를 찾는 것이 이 게임의 규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투자하고 회수할 것인가?
앞서 이야기 했던 내용을 고려하면 회사가 상장되기 전 또는 Pre-IPO 투자 단계에서 주식을 매도하는 것도 꽤나 합리적인 전략일 수 있겠습니다. 회수에 대한 가능성으로 전에 없던 거래 수요가 생겨 의미 있는 물량을 정리할 수 있고, 상장 후 가격 형성에 대한 리스크 노출까지 방어할 수 있는 매력적인 기회니까요.
좋은 회사를 오랫동안 보유해야 한다는 투자 구루들의 원칙에는 여전히 백번 동의합니다. 다만 투자와 회수에 있어 전보다 유연한 전략을 고민하게 된 것은 우리가 회사의 성장 단계의 아주 일부분, 그 중에서도 비교적 초기에만 동행하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익이 실현되지 않은 회사에 붙는 가격은 누구나 쉽게 비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이오, 로봇, AI가 대표적인 사례죠. 우리는 말도 안되는 가격이라며 손사레를 쳤던 회사가 상장 후 더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오르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그와중에 과감히 투자해 짭짤한 수익은 본 투자자들은 무슨 생각이었을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남들이 알아보지 못한 성장의 가능성을 보았거나, 그보다는 미래에도 성장에 대한 내러티브가 설득이 될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상장 후에도 프리미엄이 유지되는 회사에 투자하자는 것은 꿈을 가진 회사에 투자하자 식의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회사의 사업성, 현실적인 스케일업 가능성, 회사가 가진 주가 부양의 재료까지 간과할 게 정말 하나도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4할 타자가 되기 위해
오늘도 투자는 어렵습니다. 내일의 날씨도 맞추기 어려워지는 세상에서 어찌 모든 회사들의 미래를 맞춰 투자하겠습니까.
그럼에도 10개 중에 4개의 공을 안타로 쳐내는 선배님들은 언제나 계셨던 것 같습니다. 놓치게 될 6개의 공을 두려워하기보단 쳐낼 4개의 공에 집중하는 최근의 교훈을 공유하며 오늘의 이야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