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런 버핏이 되고자 하는 VC 심사역 이야기 [VC심사역 커리어 가이드]
워런 버핏과 같은 투자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VC 심사역의 커리어에 대한 진솔한 고민이 담겨 있는 글입니다.
1. 어떻게 주식 투자를 업으로 삼게 되었나
지난 글 <주식 투자자> 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커리어를 자산운용사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 투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다소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빈부격차를 해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는데 이 사건을 언론에서 접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결론은 소득 분배의 악화 / 빈부격차의 심화였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이 문제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지만 소득 분배가 지난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와중에 벌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거시 경제적 이벤트가 미시 경제에 영향을 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저축 은행 위기, 글로벌 공급망 위축에 따른 위기 등 예상할 수도 없는 이벤트들이 우리의 삶을 위협할 것입니다. 위기 상황 때마다 빈부격차가 심화되면 사회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삶을 유지할 수도 없고 자본주의 이념도 살아남지 못하지 않을까요?
저는 처음에는 거시 경제적 측면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대학교 3학년 때 행정고시를 잠깐이나마 준비하기도 했고 4학년 때는 한국은행 입행 시험 공부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금리가 거시 경제와 실제 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의문을 품은 채 다른 커리어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거시적인 해결책이 정답이 아니라고 판단하였고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직접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면 좋겠다' 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투자를 잘해야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어렴풋이 생각하며 현명한 투자자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주식 투자를 소액으로나마 어릴 때부터 했기 때문에 자산운용사에서 주식 투자자로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죠.
2. 현명한 투자자가 되고 싶어
어떤 투자자가 되어야 할까라는 고민에 답을 준 건 벤자민 그레이엄의 <현명한 투자자>였습니다. 현명한 투자자에서 정의한 투자의 개념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저만의 철학을 가지고 올바른 투자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현명한 투자자> 책을 수시로 읽고 버크셔해서웨이의 주주총회를 보면서 이 생각을 강화해 왔습니다. 저한테 주식 투자는 벤자민 그레이엄과 워런 버핏의 말을 따르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블로그 단톡방에 <워런 버펏의 주주서한> 책에 나온 문구들을 공유하면서 주변에 복음을 전파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투자 구루들의 책과 영상을 접하고 혼자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투자라는 게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니라 인생 여러 곳에 적용할 만한 철학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투자 자체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주식 투자는 연애와도 같다. 벤처 투자는 20대의 연애다. 해서는 안 될 이유가 수두룩하지만 매력 포인트 하나만 있어도 할 수 있다. 상장 주식 투자는 30대 이후의 연애다. 모든 리스크를 다 따지고 가야 한다.
출처 : A.I
상장 주식에 투자할 때 이들의 투자 철학을 적용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면서 투자에 대한 재미는 배가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벤자민 그레이엄과 워런 버핏이 말하는 투자는 무엇일까요? (1) 이해할 수 있는 사업을 하며 (2) 장기 전망이 밝으며 (3) 정직하고 유능한 사람들이 경영하고 (4) 가격이 매우 매력적인 기업에 자금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투자를 하기 이전에 이 4가지에 대해서는 꼭 고민을 해야 합니다. 너무 당연한 말인가요? 이 4가지 중 한 가지라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투자가 아니라 투기 행위입니다.
제가 지난 글에서도 그렇고 계속 투자의 정의와 철학에 대해서 거듭하여 언급하는 것은 그 만큼 투자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정립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개별 투자 건에서 운이 좋다면 한 번쯤 성공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꾸준한 수익률을 안정적으로 거두기 위해서는 시장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흔들리지 않고 내 철학을 올곧게 지켜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시장 상황에 따라서 이랬다 저랬다 투자관을 바꾸는 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모든 상황에 맞게 변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굉장히 거만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모든 환경에 적절하게 대응하면서 살아남기엔 실력이 부족하거나 운이 부족하거나 둘 다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자산운용사에서 근무하면서는 '투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운용사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저에게 할당된 북(투자 가능 금액) 안에서는 자유로운 의사결정이 가능했기 때문이죠. 어떤 회사의 주가가 오를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롭고 활발한 분위기에서 회사 내용에 대한 심도깊은 토론이 이뤄졌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투자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죠.
3. VC투자의 본질은 뭘까?
그러다가 저는 갑작스럽게 VC로 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VC 설립 멤버로 참여하게 되었죠. 처음에는 VC도 자산운용사처럼 투자를 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크게 보면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투자하는 기업의 생애 주기가 앞당겨졌을 뿐 회사를 분석하고 투자할 만한 기업을 골라 자금을 집행하는 본질은 비슷했으니깐요. 하지만 VC에서 2년 동안 일하면서 느꼈던 것은 VC 심사역이라는 커리어는 현명한 투자자가 되기 위한 커리어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왜 VC 심사역을 투자자라고 볼 수 없다고 느끼게 된 걸까요?
일단 VC의 투자가 위에서 정의된 투자의 개념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2)번 조건인 장기 전망이 밝으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VC의 투자는 대부분 성장 산업에 집중돼 있습니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7~10년을 보고 하는 투자이기 때문에 중장기 성장성이 기대되는 산업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2)번 조건을 충족하는 것 아닌가요? VC 투자는 개별 기업의 성장성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전체 산업의 성장성을 보고 하는 투자입니다. (개별 기업에 대한 논의로 한정지어 생각하더라도 (2)번 조건을 충족하진 못합니다. 미래 성장성은 장기간에 걸친 과거 데이터에 기반하여 판단해야 하지만, 벤처기업의 경우 확인할 수 있는 과거 데이터 자체가 없기 떄문입니다.)
특정 산업이 미래에 성장할 것으로 기대되면 그 안에 있는 핵심 기업들 여러 개를 묶어 분산 투자를 하는 것이죠. 이는 분산투자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워런 버핏의 생각에도 배치되는 것입니다.
분산 투자를 하는 이유는 개별 투자 건에 대해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1)번 조건처럼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영역(Circle of competence)에서 확신을 갖는 기업에만 집중하여 투자한다면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괜히 모르는 기업에 분산투자를 한다고 리스크가 사라질까요? 금융위기가 찾아와서 해당 기업의 주가가 폭락한다면 그 기업에 대한 포지션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VC 투자의 경우 전체 산업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에 기반하여 산업 내 유망 기업 여럿에 널리 투자를 합니다. 저는 이것을 투자의 영역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만 VC 투자의 필요성을 부정하진 않습니다. 대신 VC의 본질은 창업 생태계 보육에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누가 성공할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최대한 많은 회사의 성공 가능성을 높여줘야 하는 게 VC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VC 펀드의 주요 출자자인 모태펀드/성장금융의 경우 출자를 통해 많은 수익을 내는 게 목표가 아닙니다. 특정 조건을 갖춘 기업에 대해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해당 생태계의 기반을 갖추게끔 기여하는 것이 주요 목표이죠. 결론적으로 말하면 VC 투자는 일반적인 투자와 다르게 일정 부분 공공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제가 텔레그램 채널에 업로드한 것처럼 벤처캐피탈의 펀드는 투자기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대개 투자기간이 4년 이내로 되어 있는데 4년 내에 정해진 금액 만큼 투자를 하지 못하면 페널티를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기간 내에 빠르게 투자를 집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해당 기간 내에 합리적인 투자 건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투자를 해야 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시장 상황에 따라 우리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매수할 수 있는 회사를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2~3년이 딱 이러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러한 상황에서도 페널티를 받지 않기 위해 무리한 투자를 한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4)번 조건으로 이어졌는데요, 돈 벌기 위해 하는 게 투자인 이상 우리는 합리적인 가격에 사야 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창업 7년 이내 기업의 가치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어떠한 밸류에이션 방법론을 가져와도 쉽지 않습니다. 워런 버핏의 경우에 기업 가치를 구할 때 특정 값이 아니라 범위로 산출한다고 합니다.
사실 찰리와 나는 유통되는 주식 가운데 일부에 대해서만 비교적 자신 있게 내재가치를 평가할 수 있으며, 그것도 근사치를 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 범위로 산정합니다.
출처: 워런버핏의 주주서한
벤처기업의 가치를 범위로 구한다고 하면 최악의 경우 0에서 모든 희망회로가 현실이 됐다고 가정할 경우까지 그 범위가 상당히 넓으며 합리적인 기업 가치 범위 산출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커리어에 대한 고민과 조언
결론적으로 VC가 하고 있는 일은 투자가 아니며, 창업 생태계 조성 및 개별 기업 보육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투자라는 일 자체가 재밌어서 다양한 투자 생태계를 경험하고 싶었고 VC로의 이직에도 거리낌이 없었지만 실상은 VC에서 하는 일이 생각과는 달라 많은 혼란을 겪었고 현재 진행 중입니다.
저 역시 VC업계에 들어온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은 새내기이지만 제가 투자 업계에서 느꼈던 것들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최근에 산업계에서 VC 업계로 입문한 분들/업계 진입을 희망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 각자의 꿈을 가지고 들어오셨겠지만 '투자'를 업으로 삼기를 희망하시는 분들에게 VC가 정말 최적의 선택인가에 대해서는 한 번쯤 다시 고민해 보시기를 바라면서 이 글 마치겠습니다.
VC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많은 심사역분들 항상 응원합니다.